*출처: 김재욱의 바이블로그 http://woogy68.blog.me
<"나 구원받은 거 맞아?ㅠㅠ"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
어떤 청년이 일상의 죄와 신앙적 슬럼프로 구원의 확신까지 흔들리는 괴로운 마음을 하소연해 왔습니다.
"너무 생각과 육신의 죄도 많이 짓고, 갖가지 복잡한 내면과 부족한 인성으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삽니다. 유익한 설교나 글을 읽을 때는 잠시 힘이 나지만 그때뿐이고, 또다시 절망과 의심에 빠집니다. 성화의 길은 보이지 않는 나... 정말 구원받은 게 맞긴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진지한 성도라면 공감이 가는 고민일 것입니다. 크리스천인데 이런 마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힘을 내라는 취지에서 그 이유와 함께 해법을 몇 가지 적어 봅니다.
1. 마귀의 고소
일단 남의 탓(?)부터 해 봅니다.
마귀는 먹고 하는 일이 이겁니다. 틈만 나면 훼방하고, 고소하고, 이간질합니다. 이는 그의 정체성이기 때문이죠.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우리를 모함하고 일러바치면서 우리의 마음속에 패배의식과 자괴감과 죄의식을 심고, 의심과 불신과 유혹의 씨를 뿌립니다.
"넌 자격이 안 돼. 알잖아. 오늘도 네가 한 짓을 보라고."
"헐... 네까짓 게 무슨 구원..."
"너 정말 하나님 앞에 당당해? 내 눈을 바라봐.... (??)"
"넌 어느 모로 보나 내 과지, 구원과 성화에는 안 어울린다고."
"설마 구원이 영원히 안전한 약속이라고 믿는 거야? 순진하긴...."
이런 외침이 들리십니까?
마귀는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평가절하하고 '그럴 리 없다'라고 외칩니다. 고소하는 자는 하루 종일 우리 마음에 불편함을 심고 그것이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면서 부채질을 하고 물을 줍니다. 그러나 이 지긋지긋한 고소의 주인공은 우리 주님이 그 원수를 갚아 주실 것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구원과 힘과 우리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그리스도의 권능이 임하였도다. 우리 형제들을 고소하는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그들을 고소하던 자가 쫓겨났도다. (계 12:10)
2. 죄의 영향
그러나 마귀의 고소만이 모든 원인은 아닐 것입니다. 마귀의 소리가 차단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으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견고한 방음벽은 죄로 인해 구멍이 숭숭 뚫립니다. 그 사이로 마귀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죠.
영-혼-육
영과 육 사이에 있는 '혼'은 사람 자체이며 우리의 자아이고 마음이며 목숨입니다. 죄는 육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교통해야 하는데 자꾸만 육적인 것에 기울다 보니 우리의 혼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뒤틀리고 맙니다. 혼이 비정상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럴 때나 쓸 수 있는 말일 것입니다.
죄는 마귀와 통하는 끈이며 실입니다. 우리의 죄와 연결된 실을 끊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마귀가 고소하는 소리를 차단하지 못하고, 만성 이명증으로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성령 충만하면, 완벽하진 않아도 기쁨이 넘쳐흐르고 유혹을 거뜬히 이기며, 자잘한 일들에 절망하거나 일희일비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목표만으로 나아갑니다.
위의 질문을 한 젊은이 같은 요즘 청년이나 학생들은 이런 것을 알기가 참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세상이 무질서하고, 복잡하고, 늘 온라인으로 연결돼 있으며, 죄의 유혹도 많고 주변에 참된 신앙인도 많지 않습니다. 또한 지식과 정보는 많아졌지만 오염된 교리가 많아 갈피를 잡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정보, 마귀의 정보를 차단하기 위해 애쓰고 삶을 단순화시켜야 합니다. 정보와 미디어의 '미니멀리즘' 실천이 영혼의 살 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일상의 죄는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괴로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모두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부족하지만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임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어떤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분의 사람이 아니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해 죽었으나 성령은 의로 인해 생명이 되시느니라. (롬 8:8~10)
물론 우리는 죄와 멀어지고 죄를 등지려는 끝없는 노력을 해야 하며, 죄를 지었을 때 지속적으로 회개하고 고백하며 다시 일어서야 할 것입니다. 죄와의 거리가 확신과의 거리를 결정할 테니까요.
3. 자녀라는 증거
우리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존재라 해도 부처나 알라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성령님을 통해 주시는 양심의 소리와 성경을 통해 주시는 말씀에만 찔림을 받는 것입니다.
마귀도 자기 자식은 느긋하게 관리합니다. 가만 놔둬도 지옥을 향하고 있는데 뭣하러 공을 들일까요? 내 개인 짜장면은 언제 먹어도 내 꺼니까, 중간에 있는 탕수육부터 먹어 둬야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를 자꾸 흔들어 댑니다. 빼앗아 올 수는 없어도 괴롭힐 수 있고, 좌절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당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조금은 뻔뻔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높으신 분이 지극히 낮고 친근한 자리로 내려와주시는 어마어마한 은혜이며, 말로만 아버지가 아닌 '아빠'의 의미입니다.
세상에 어떤 아빠가 자기 자녀가 완벽하고 완전하기를 기대할까요? 아직 부족하고 완성되지 않은 자녀라면 넘어져도 일어나기를 바라고, 그런 과정에서 스스로를 비관해 자살하거나 마음이 다치지 않기만을 바랄 것입니다. 그리고 힘들 때 혼자 해결하지 말고 든든한 아빠가 뒤에 있으니 마음껏 펼치면서 기쁘게 살기를 바랄 것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하셨는가. 그런즉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그분께서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 (요일 3:1~2)
우리에게는 아직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지 못했지만 서류상으로 확신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라면 무엇을 가장 싫어하실까요?
아버지가 진짜 맞는지 의심하는 것.
어마어마한 구원의 선물을 주셨는데 별로 안 기뻐하는 것.
아버지가 그 선물을 줬다 뺐는 사람으로 오해하는 것.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의심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며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변호하시는 예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한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1~3)
4. 느낌에 의존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 아무리 말씀이 있어도 죄로 인해 마음이 냉랭하고 절망적이면 잘 와 닿지가 않고, 감동과 감흥을 잃기 쉽습니다. 한마디로 느낌이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느낌에 따라 요동하게 두면 이 세상에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이 만든 은행에 전 재산을 넣어 두고도 발을 뻗고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은행에 대한 공신력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전쟁이 날 것 같다든지, 그 은행의 부실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든지 하면 그때부터는 의심이 생기고 내 돈을 잃게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겠지요.
하나님이 정말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나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느낌만 가지고는 조그마한 세상 일 하나도 뒤집을 수 없고,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그 은행은 건재한데 나의 느낌만 문제라면 현실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우리의 느낌이나 매일 오르내리는 감정을 보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시험에 통과하려면 점수가 되어야 하고 자격 요건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응시생들의 합격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나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은 채점자들이 알 필요도 없고 고려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느낌이 아닌 믿음을 보십니다. 어린양의 피가 칠해진 집이면 그 안에 누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있든지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피가 나를 살려 줄지 몰라 불안한 느낌으로 긴긴밤을 보냈더라도 어쨌든 피를 바른 그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순종함으로써 믿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느낌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에만 의존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갈대와도 같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느낌으로 선 사람은 느낌으로 망합니다.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아서 믿지 못하겠다며 멸망으로 들어갑니다. 크리스천들 중에도 느낌이 동반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경의 중요성과 준엄함을 간과하여 큰 절망에 빠집니다. 말씀이 없다면 결국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인데도 말씀의 완전함에 대해 소홀히 여기곤 합니다.
사실 말씀의 확실성, 즉 시대나 사람에 의해 다시 쓰이거나 다시 해석되지 않는 불변성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사상누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던 사도 베드로는 자신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귀로 들은 하나님의 음성보다도 기록된 대언의 말씀이 더 확실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을 믿기보다는 말씀의 확실성을 믿은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나온 이 음성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들은 것이니라. 또한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벧후 1:18~19)
5. 말씀의 부실
어떤 이들은 잘못된 성경 번역이나 거기서부터 나온 잘못된 교리로 고통을 받습니다. 바른 말씀이 있는데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날은 구원을 받았으면 천국을 미리 경험하듯 살라고 하고, 어떤 날은 구원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다가 마지막에 완성되는 것처럼 말씀이 선포됩니다. 바른 교리를 전한다기보다 설교자가 전달하려는 개인적 주제에 말씀이 꿰맞춰지고 인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설교입니다.
구원은 이루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취소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류에 죽음이 임했을 때 그것을 돌이킬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그것이 삶으로 바뀌면 다시 돌이킬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죽음을 돌이키는 메시아는 있지만 삶을 재차 돌이키는 죽음의 사신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구원은 끝까지 유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보하심을 보건대 그분은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느니라. (히 7:25)
6. 구원을 못 받았기 때문?
마지막으로 꼭 점검해야 할 것은, '정말 구원받았는가'입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어떤 사람에게도 증서를 따로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교만해지고 다시 방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말의 의심'은 우리와 평생 같이 가면서 끝없이 우리를 괴롭힐 테지만, 그것이 나태하고 가라앉은 마음을 휘저어 우리를 또한 건강하게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이 한순간도 의심하면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은 이상한 집단임이 틀림없습니다.
사람의 근심은 두 종류입니다. 물론 의심은 좋지 않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즉 자기 생명에 대한 근심은 구원을 이룹니다. 또한 성도의 좋은 근심은 구원을 점검하게 만들고, 자신을 돌아보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느니라. (고후 7:10)
구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구원받았는지 말씀을 통해 점검하고 나면 의심을 버리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괴감이나 의심도 자연스러운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근심은 절대 하면 안 되고, 근심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근심이 되는 것은 인정하시면서 위로와 권면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래 그것에 빠지지 말고 힘을 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필요가 있어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해 잠시 근심하고 있지만 그 구원을 크게 기뻐하나니
이것은 너희 믿음의 단련이 불로 단련해도 없어지는 금을 단련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그분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지금도 너희가 그분을 보지 못하나 믿으며 이루 말할 수 없고 영광이 가득한 기쁨으로 기뻐하나니
이는 너희가 너희 믿음의 결말 곧 너희 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벧전 1:6~9)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사도를 통해 우리에게 이토록 멋지고 든든한 안전의 말씀을 미리 주셨다는 것이 감격스럽지 않나요? 그러므로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성도의 고민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갖고, 힘을 냅시다. 우리는 이미 '믿음의 결말'로써 구원을 받았으니 지금은 초라하고 근심하는 존재지만 예수님이 오실 때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날 테니까요.
구원의 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립시다!